
# 막12:13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하여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내매 14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15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한대 예수께서 그 외식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하시니 16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17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그들이 예수께 대하여 매우 놀랍게 여기더라
–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은 권력을 가진 종교 지도자들의 집요한 도전을 받게 됩니다. 이전에도 그들은 예수님을 말로 걸어 넘어뜨리려 했지만, 이제 예수님은 그들이 없애고 무너뜨려야 할 가장 중요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이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합니다. 언변과 논리에 능한 사람들을 선별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흠을 잡아, 대중 앞에서 그의 권위를 깎아내리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당신이 그들에게 죽임당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음해하려는 모든 악한 의도와 계획이 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습니다.
– 그들은 질문에 앞서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의 존재와 말과 생각이 완전무결하다는 겁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이 작은 말실수를 하기만 하면 곧 예수님의 존재는 거짓이 될 수 있습니다. 아무리 훌륭하고 인품이 좋은 사람이라도, 그가 가진 죄가 말로 드러나게 됩니다. 사람이라면, 작정하고 시험하는 그들의 계략에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눈에 불을 켜고 흠을 찾을 테니까요. 유대인들 앞에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문제는, 그래서 그들의 목적에 맞는 굉장히 탁월한 질문입니다. 가이사의 지배를 받고 있는 유대인들 앞에서, 구원자이자 메시아이자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라는 예수님의 존재가 유대인들에게 어떻게 보이든 문제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의 왕으로서 가이사가 불합리하다고 하면 반역이 되고, 바쳐야 한다면 로마의 종이 메시아일 수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 그러나 예수님께는 그들의 질문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질문은 예수님의 높이와 위치를 흔들기 위한 것인데, 예수님은 당신 자신의 권위와 높아짐에 대한 주장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위상은 그 주변의 사람들이 만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 오셨고, 곧 그것을 위해 자기 몸을 고통과 죽음에 내어 줄 것입니다. 가장 높아지기 위해 가장 낮은 자리로 가는 예수님의 관점을, 그들이 이해할 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을 외식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의 중심을 고려하지 않고, 겉모습만 가지고 중심을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큰 왜곡을 만들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질문입니다. 이런 관점으로는 마음의 중심이 아닌 겉모습이 핵심이 되어 버립니다. 이 관점으로는 모든 선한 의도가 어그러지고, 사람의 마음이 무시되며, 서로가 보이는대로 서로를 판단하여 편을 가르고 정죄하게 되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때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빼놓고, 글자만 받아들이게 됩니다.
– 예수님은 데나리온의 형상과 글의 주인인 가이사에게 바칠 것을 바치라고 합니다. 이 주장을 할 경우 질문한 자들이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가이사의 지배를 받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틀렸다고 공격해야 하는데, 예수님은 바로 이어서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바치라고 합니다. 질문하는 자들은 가이사를 인정하는 것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반대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렇게 생각했고, 그곳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한다는 말씀을, 현실적인 관점에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점은 달랐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현재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는 가이사의 지배와 상관없이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이사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복음을 받아들이고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과거에 타국에 끌려가서도 하나님과 함께 했던 것을 기억해보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이 두 가지 쟁점을 다른 차원으로 분리시키면서, 로마에 반기를 드는 지도자가 아님을 밝히고, 하나님의 메시아가 아니라는 주장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 막12:18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19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어떤 사람의 형이 자식이 없이 아내를 두고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0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21 둘째도 그 여자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셋째도 그렇게 하여 22 일곱이 다 상속자가 없었고 최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23 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 곧 그들이 살아날 때에 그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2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25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26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말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27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
– 여기 사두개인들 역시, 대제사장들과 마찬가지로 지금 세상의 관점으로 영적인 세계를 보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글로만 듣고, 성령님을 통해 마음의 중심에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 결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듣고도,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자기 소견대로 말씀을 각각 해석하고 자기가 인식하는 범위 안으로 말씀을 한정지어 버립니다.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의도와 마음이 와닿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두고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해서 오해했다고 말씀하십니다.
–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부활이 없고 사람이 죽고 그것이 끝이라면, 사람에겐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하나님이 당신에 대해 모세에게 이야기할 때, 이미 죽은 조상들의 이름을 말하는 것이 무의미한 일이 됩니다. 죽은 자 가운데에서 다시 살 때에는,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모습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인과와 상식과 개념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입니다. 비록 그 삶이 무엇인지 지금 알 수는 없지만, 성경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알면, 부활 후의 세상이 있다는 말도 신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곧, 그것을 그들 앞에서 증명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