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막14:12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여짜오되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께서 유월절 음식을 잡수시게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하매 13 예수께서 제자 중의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성내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가서 14 어디든지 그가 들어가는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 하시더라 하라 15 그리하면 자리를 펴고 준비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라 하시니 16 제자들이 나가 성내로 들어가서 예수께서 하시던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 음식을 준비하니라

– 예수님과 제자들이 평소에 음식을 어떻게 구해서 먹었을지 궁금합니다. 오늘처럼 그들을 위해 준비된 자리와 음식이 있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밭의 곡물을 먹는 경우도 있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의 질문은, 그래서 제게 생소합니다. 당장 먹을 것도 예수님에게 질문하고 예수님의 답을 기다리는 이 상황이, 제게는 이상하고 제자들에겐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어떻게 보면 대책 없이 사는 것 같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가장 기본적인 부분부터 전부 예수님께 의지하는 삶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저의 삶을 책임지려 하고, 저의 삶에 대해 2중 3중의 안전 대책을 세우려고 노력하는 것이, 제가 하나님을 멀리하는 원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실제로 물질적으로 풍요롭지 못하여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더라도, 그것을 위해 노력하며 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그런 삶을 살면 무조건 하나님과 멀어진다는 극단적인 결론은 더 큰 문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보낼 때, 언제는 옷도 먹을 것도 챙기지 말라 하다가, 언제는 단단히 채비를 하라고 하시기도 하니까요. 외형적인 모습만을 근거로 판단하는 것을 피해야 합니다. 결국,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을 향해 있는가를 봐야 합니다. 하나님만 의지한다는 핑계로 어떤 대책도 없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마치 등잔의 기름을 준비하지 않는 여인들처럼요. 예수님만을 믿고 신뢰하고 따른다는 것은, 매우 치열하고, 피곤하고, 매일 낙심하고, 매일 시험에 드는 삶입니다. 예수님께 한 번 메시지를 받고 끝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오늘 저녁은..’, ‘내일 아침은..’, ‘내일 점심은..’ 하면서 계속 물어보는 것처럼, (제 관점에선) 계속 바뀌는 예수님의 말씀을 계속 민감하게 들으며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어야 합니다. 때로는 굶을 수도 있고, 때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저는 제 손에 들린 맛있는 음식이 아닌, 예수님의 입을 주목하고 있어야 합니다.

–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제자들은 결코 일반적이지 않은 과정을 거치며 유월절 음식을 준비합니다. 저로선 전혀 예상하지 못할 상황과 때에, 준비된 사람들을 통해 당신의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제가 누군가에게 그런 준비된 사람의 역할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이 일에 참여하는 동역자들을 만나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모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동역자들과 함께 교제하며 서로 위로하는 일이 풍성해지길 기도합니다. 집과 음식을 준비한 집 주인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자리를 준비한 후, 제자들의 방문을 보고 얼마나 기뻐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하며 살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만나게 해 주실 많은 동역자들과의 교제를 기대합니다.

# 막14:17 저물매 그 열둘을 데리시고 가서 18 다 앉아 먹을 때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하신대 19 그들이 근심하며 하나씩 하나씩 나는 아니지요 하고 말하기 시작하니 20 그들에게 이르시되 열둘 중의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21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

– 유월절 식사에서,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 중 당신을 팔 자가 있다는 것을 밝히십니다. 제자들은 또 하나의 근심거리를 얻습니다. 각자 자신들의 결백을 증명하려 합니다. 예수님은 그가 열 둘 중 하나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유다는, 예수님이 자기 속마음을 알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의 마음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앞에서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지 않고, 최대한 빨리 대제사장들에게 예수님을 넘겨야겠다는 마음입니다. 유다는 그가 마음먹고 실행할 죄가 얼마나 크고 무거운 것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가 다시는 예수님께 돌아갈 수 없다고 확신합니다. 이 세상 누가 봐도 그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이미 저질렀고, 이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죽고 다시 살아나는 것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처럼요. 이미 모든 결론이 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수많은 죄와 배신에도 그들을 떠나지 않으셨고, 탕자가 돌아오는 것을 너무 기뻐했던 아버지와 같은 분입니다. 그는 그의 한계 안에서 예수님을 봅니다. 그는 그의 자아와 기준을 버린 적이 없습니다. 그 수많은 예수님의 말씀과 이적과 병고침과 죄사함을 보면서도요.. 그는 그가 용서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그의 죄를 위해 죽을 것이라는 사실도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의 죄를 못 이기고 예수님을 떠납니다.

– 예수님의 죄사함을 받아들이는 것도, 죄가 가득한 우리에겐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저는 저 스스로를 정죄하는 것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오늘, 저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 예수님의 죽으심을 깊이 묵상하고 감사하는 하루가 되길 기도합니다. 그 은혜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제 안에서 일하신 성령님을 누리는 오늘이 되길 기도합니다.

– 유다의 배신은 그와 대제사장들에겐 엄청나게 큰 사건이지만,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 미치는 영향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그 죄값이 돌아가서 그들에게 화가 있을 것입니다. 차라리 유다가 태어나지 않는 것이 좋았다고 표현할 정도로, 그들이 감당해야 할 대가가 너무나 큽니다. 복음이, 은혜가, 사람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전적인 역사하심으로, 하나님이 택하신 이들에게 넘치도록 부어지는 오늘이 되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