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의 명을 따라 여로보암에게 경고한 ‘하나님의 사람’은, 주어진 사명을 잘 수행합니다. 목숨을 걸고 간 용기와 믿음이 잘 드러나고, 얼마나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잘 귀기울이며 행동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일이 끝난 것 같은 그 때, 잠시 잠깐 긴장이 풀리는 시점에, 그는 아주 잠시 잠깐, 하나님을 잊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잊은 것도 아니고, 그런 행동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것인 줄도 압니다. 그러나 그는 늙은 선지자의 말을 핑계로, 자신의 고단함을 덜 수 있는 길을 선택합니다. 그런 선택을 한 이유는 내 탓이 아니라, 저 사람이 날 강하게 꾀었기 때문이고, 저 사람 탓이라는 합리화가, 자신이 하나님의 뜻과 다른 선택을 할 때의 죄책감을 덜어 줍니다. 말씀을 통해 도전을 받고 무언가를 결단하여 시작하는 것은 매우 흔하고 쉬운 일이지만, 그 일을 끝까지 유지해 내는 일은 너무나 어려운 일입니다. 이런 유혹은 매일 매순간 저를 흔듭니다. 마치 외줄을 타는 것처럼, 잠시 잠깐이라도 흔들리면 바로 떨어지는, 제게 너무나 불리한 싸움입니다. 그리고 거의 모든 싸움에서, 저는 몇 걸음 가 보지 못하고 떨어집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해?’라는 질문을 매일 이겨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말씀하신 것이 매일 제게 가득 채워져도 이길까 말까 한 싸움입니다. 매일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단 하루라도 그렇지 않으면, 다윗이 전장에서 잠시 물러났을 때 밧세바를 보고 품은 욕심처럼, 아담과 하와가 매일 보던 선악과를 그 날에는 먹은 것처럼, 반드시 떨어지고 맙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하지만, ‘시작’은 너무 쉽습니다. ‘결단’하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저의 어떤 좋고 위대해 보이는 결단도, 열매가 맺힐 때까지 인내하고 지속되지 않는다면, 정말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입니다. 저의 욕심과 안위를 위한 선택이 단 하루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 늙은 선지자는 왜 하나님의 사람을 자기 집에 초대하려 했을까요? 하나님의 사람을 장사지낸 태도를 보면 결코 악한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최고의 환대를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만큼 무언가 절박한 이유가 있었을까요? 그를 데리고 오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까지 거짓으로 말해야 할 이유가 있었을까요? 제 마음대로 상상해 보면,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임재를 간절히 원하지만, 어떤 이유로든 그런 경험을 한 지가 너무 오래 되었고, 앞으로도 기약이 없는 답답한 상태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어느 날 정말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역사를 드러내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자기도 그런 하나님을 다시 만나고 싶은 간절함에 꼭 하나님의 사람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고 이야기를 나누려 하지 않았을까요. 하나님의 사람의 입장에서는 다른 선지자가(그가 말하는 단어와 지식들을 통해 그가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판단하고 신뢰하지 않았을까요)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워 대접하는 것을 좋게 보았고(자신도 배고프고 피곤했을 테니), 늙은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람을 대접하는 것이 선한 일이고, 자신도 하나님과 더 가까워질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사람이 스스로 생각하기에 좋고 합리적인 의도였다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맞다는 보장은 당연하게도 없습니다. 저는 결과를 알고 이 이야기를 접하기 때문에 이들의 잘못과 어리석음이 너무나 잘 보이지만, 제가 그 이야기 속에 있는 사람이라면, 저 역시 저의 연약한 육체와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는 판단력 속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제대로 분별하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