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막5:35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 혈루병에 걸렸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며 나았던 놀랍고 감동적인 순간에, 회당장의 딸이 죽었다는 아픈 소식이 들려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는, 같은 공간에서 기쁨과 슬픔이 동시에 발생합니다. 제가 어찌할 수 없는 세상의 일들을 보면, 제가 정말 무력한 존재라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저의 의지나 노력이 이런 것들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여지의 한계가 너무 명확하기 때문입니다. 12년의 혈루증으로 고통받는 영혼이 제 가족이라면, 뭘 할 수 있었을까요. 위로의 말도 한두 번이죠. 어린 딸을 잃은 아빠에게 도대체 제가 옆에서 뭘 해줄 수 있을까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저의 그 어떤 말과 행동도 그의 슬픔을 조금이라도 나아지게 해줄 수 없습니다.
–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상황에서 무언가를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한 여인을 평생 괴롭히던 병과, 그 병을 낫게 하기 위해 세상의 수많은 것들을 의지해왔던 삶을 낫게 하심으로, 그를 기쁘게 하셨습니다. 깊은 슬픔에 빠진 한 영혼을 완전히 구원하셨습니다. 그런데 회당장의 경우는 차원이 좀 다릅니다. 이것은 죽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한 사람이 죽으면, 그대로 끝입니다. 그 자리에 있었지만 없는 것이 되고, 그의 생각과, 마음과, 목소리와, 눈빛과, 버릇과, 습관과, 그가 있던 자리와, 그와 이야기하고 함께 했던 모든 시간이 그냥 사라져 버립니다. 기억 속에, 마음 속에 남아있다는 말이, 어떤 관점에서 보면 얼마나 공허하고 의미 없는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회당장의 절망이 얼마나 클지 제가 상상이라도 할 수 있을까요. 그 딸을 위해 자신의 모든 기준과 관점을 버리고 예수님 앞에 엎드려 빌던 회당장의 간절함과 절박함의 크기를 생각해 봅니다. 무능한 부모라는 자괴감, 죽는 순간에 함께 있어 주지 못한 후회,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최악 중의 최악의 순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딸의 죽음을 경함한 아빠도 그렇지만, 죽은 딸의 삶은 그보다 더 큰 비극이고요.
– 회당장의 집에서 온 사람들은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치유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지만, 딸이 죽은 시점에서 그들의 소망은 사라졌습니다. 너무 당연한 반응입니다. 합리적이고 마땅한 말입니다. 그들의 시선에서는, 예수님이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짧았던 예수님과 그들의 만남은 여기서 끝입니다. 이제 그들은 예수님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이 그 관계를 끝내지 않고 이어가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예수님의 표정이 어땠을지 상상해 봅니다. 동정하는 표정은 분명 아니었을 것이고, 같이 슬퍼하거나 힘이 빠진 느낌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진지하지만 평안한 표정으로 회당장의 눈동자를 지켜보며 그의 동의를 기다립니다. 농담으로 말하는 건가, 이 사람이 날 농락하는 건가, 사기꾼이 아닌가 수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치지만, 한 번 자신의 세계를 다 깨부수고 예수님께 엎드린 경험이 있는 회당장은, 다시 한 번 주변 사람들의 시선과 상식을 의식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이미 회당장으로서의 권위는 아까 사라졌습니다. 이 일이 실패하여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미친 사람을 믿은 어리석은 자라고 조롱할 지라도, 지금 나는 이 사람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나의 소망과 바람, 욕심, 이기심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사람을 신뢰하는 마음이 지금 내 마음에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이 마음은 분명 내 의지로 생긴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아까 예수님 앞에 엎드리면서 나는 큰 용기를 내어 나 자신을 다 내려놓고 깨뜨렸다고 생각하는데, 무언가, 훨씬 거대한, 깨져야 할 것이 지금 내 안에 있다는 것을 감지합니다. 지금 내가 내려놓은 자존심과 체면은, 아주 얇은 껍데기뿐인 것을 알겠습니다. 나의 모든 것이 부정당하고 없어질 것 같은 두려움이 있지만,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한 개도 없겠지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뭘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마음의 중심에 작은 평안이 실낱같이 샘솟기 시작합니다. 여전히 절망적인, 희망이 다 꺼진 이 상황 속에서.
# 막5:37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38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39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40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42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43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 회당장은 예수님과 함께 자기 집으로 걸어갑니다. 이미 끝난 상황이 펼쳐집니다. 사람들이 딸의 죽음을 슬퍼하고 통곡하고, 이후 절차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회당장과 함께 온 예수님의 말은 정말 생뚱맞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딸의 죽음을 확인했는데 자고 있다니요. 비웃을 만합니다.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사람이 와서 저런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는지. 그러나 그 딸의 아버지인 회당장이 예수님과 함께 있습니다. 예수님이 모든 사람들을 다 내보내라 하시고, 회당장이 그 말을 그대로 따라 사람들을 물립니다. 친척들과, 그를 위로하러 온 친구들, 어쩌면 딸의 가장 친했던 친구들도요. 순순히 그 말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자들은 회당장과 언쟁을 벌였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냐고 말이죠. 그러나 회당장은 그들의 이해를 바라지 않습니다. 자신도 이 상황이 굉장히 비상식적인 것을 알지만, 예수님을 신뢰하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는 그 순간에는 사람들과 소통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이해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이 우선입니다. 그는 단호하게, 그러나 차분하게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말씀대로 나가 줄 것을 요청합니다.
– 예수님은 회당장과 회당장의 아내,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죽어 있는 아이가 누워 있는 방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열 두 살 아이가 살아납니다.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고, 아이가 먹습니다. 아까 분명히 죽어 있었던 딸이, 살아서 음식을 먹고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는 말씀이 실현됩니다. 세상의 깨질 리가 없었던 명확한 원리들과 법칙이 너무나 쉽게 부정되는 것을 봅니다. 제가 알고 있던 세상이 무너지고, 세상이 저를 묶어놓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제 안에 없었던 믿음이 생겼고, 죽은 딸이 살아났고, 예수님이 저를 주목하여 보십니다. 진짜 세상이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이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이 의도하신, 세상으로 인해 왜곡되지 않은 세상 말입니다. 아브라함 때부터 지금까지 이스라엘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의 능력이 저의 눈 앞에 살아 계십니다. 그 증거를 오늘 제게 보이셨습니다. 딸이 살아난 것 뿐 아니라, 제 안에서 일어난 큰 변화, 곧 거듭남을 통해 확신할 수 있습니다.
– 예수님은 당시에 이 일을 드러나지 않게 하셨습니다. 제자들도 셋만 데려가고, 죽은 딸의 방에는 회당장 부부까지만 동석합니다. 예수님을 제외하고 5명만 이 사건을 직접 볼 수 있었습니다. 이 결정으로 인해 예수님을 미워하는 자들은 예수님의 발언을 이용하여, 회당장의 딸이 정말 잠시 죽었던 것처럼 보인 것이었고, 실제로는 죽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여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많은 사람이 볼 수록 그 사건의 신뢰도가 올라가고, 예수님의 주장은 더 힘을 얻었을 텐데요. 그러나, 회당장의 심정이 어땠을까 하며 이입하며 써본 저의 상상이긴 하지만, 회당장과 혈루병에 걸렸던 여인이 받은 것은 단순히(라고 하기엔 너무 큰 일이지만) 모두가 알 수 있는 기적의 혜택을 입은 것만이 아닙니다. 혈루병에 걸렸던 여인은 치료를 받았지만 또 다른 병에 걸릴 수도 있을 것이고, 회당장의 딸도 수명을 다하면 또 죽을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오히려 그런 기적은, 목적이라기보단, 어떤 결과에 대한 증거로 사용되는 것 같습니다. 이들이 바랐던 목적은 그런 기적이 맞긴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용기를 내어 다가온 그 마음을 사용하여, 일회성으로 끝나는 소망보다 더 깊고 근원적인 필요를 꺼내십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대화하고 소통하면서 그들의 깊은 곳에 있는 죄를 보는 동시에, 그 모든 것을 받아주시고 용서하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은, 예수님이 그들의 마음을 깊이 이해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적극적인 표현이며, 이들이 예수님께 받은 은혜를 다시 한 번 확신하고 예수님이 정말 자기를 위해 이 땅에 내려오신 구원자이심을 확증하는 도구가 됩니다. 이런 인격적인, 성령을 통하지 않고서는 경험할 수 없는 관계를 빼고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만 보면,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아무리 기적을 많이 보아도,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볼 수가 없고, 그 껍데기만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불특정 다수가 아닌 한 사람 한 사람과 이야기하시고, 그들과 성령으로 소통하시고 그들을 직접 인도하십니다. 오늘 제가 만나는 예수님도, 저와 1:1로 이야기하십니다.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