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막9:2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3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4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하거늘 5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6 이는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
– 뭔가 껄끄러운 예수님의 앞날에 대해 듣고 난 후 6일이 지났습니다. 예수님이 평소처럼 산에 올라가시는데,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갑니다. 회당장의 딸을 깨우기 위해 그의 집으로 들어갔던 구성 그대로입니다. 야고보가 다른 사람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다른 제자들과 비교하여 차별이라기보단, 증인으로서 셋을 세운 것이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을 떠난 이후, 제자들은 예수님이 감춰 두었던 이야기들을 기억하며 기록했을 텐데, 이를 위하여 예수님이 그 이야기를 전달할 목적으로 제자들을 세웠다고 생각합니다. 기적, 이적 자체가 중심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이 몇 명만을 편애하여 그 현장에 있게 했다고 보지 않는 것이 좀더 맞는 생각 같습니다. 다만, 제자들의 성향을 생각해 보면, 예수님이 억지로 셋을 세웠다기보단, 제자들의 성향에 따라 역할이 구분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베드로는 워낙 열심이었고 예수님 앞에서 가장 적극적인 자였고, 마지막 만찬 때 예수님의 품 안에 있었던 자가 요한이었다는 것을 기억해 보면, 예수님과 항상 붙어 있고 싶어했던 제자들이 그런 역할을 받지 않았을까요. 다른 제자들도 각자의 성향을 따라 예수님을 섬겼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신 후 죽기까지 그랬을 겁니다. 주님께 받은 소명과 성령의 감동을 따라, 각자의 자리에서 주님의 명령을 기억하며 살아갔을 것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난을 받고, 순교하는 그 순간까지요.
– 예수님이 높은 산에 올라가십니다. 항상 한적한 곳을 찾으셨고, 그 곳에서 항상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이번에는 제자들에게 무언가를 보여주기 위한 목적입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이 변형되셨습니다. 그 옷이 비현실적으로 하얗게 변하고,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나 예수님과 함께 대화합니다. 천국에서 있을 일들을 엿볼 수 있는 현장이 됩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제자들은 몹시 무섭습니다. 상상하지 못했던 초현실적인 일들이 눈 앞에서 펼쳐집니다. 이 영적인 광경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고, 나라는 존재의 죄성과 무가치함과 초라함과 보잘것없음이 선명하게 의식되고 드러납니다. 눈으로 보이지 않을 땐 체감되지 않다가, 이것이 오감으로 체감될 때의 절망이 얼마나 큰지 상상해 봅니다. 겉으로 꾸미고 감출 수 있는 모든 껍데기가 사라지고, 제 안에 깊이 숨겨둔 모든 죄악들이 드러나 보일 때의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얼마나 큰 것인지요.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베드로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습니다. 이 영적인 세계의 사람들이 결코 필요하지 않을 초막을 세 개 짓겠다고 합니다. 그가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수님과 엘리야와 모세가 그를 보고 피식 웃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앞으로 베드로의 그런 열심이 복음을 위해 크게 사용될 것도 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 엘리야와 모세가 천국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온전히 알게 된 후 얼마나 기뻐했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 땅에서 많은 고난을 거치며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평생을 살다 갔는데, 예수님을 통해 이 땅에 온전한 구원이 이루어짐을 알게 되었으니까요. 그들이 예수님과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요. 큰 고난을 앞둔 예수님을 찬양하고 경배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 격려와 축복..은 너무 나간 생각일까요. 그렇지만 하나님이 사람으로 인해 기뻐하고 행복해하고 위로를 받는 것이 이상할 것 같진 않습니다. 하나님은 저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시니까요. 엘리야와 모세는 그들의 예수님을 향한 사랑을 아낌없이 표현했을 것입니다. 조금만 더 견디어 달라고, 응원한다고, 기도한다고, 예수님만이 갈 수 있는 길을 온전히 잘 가실 수 있기를 바랬을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그 결과를 이미 알고 확신하는 상태였겠지만, 베드로가 그의 마음을 말로 표현했던 것처럼, 제 관점에서 표현하면 이런 느낌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 막9:7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8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고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10 그들이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서로 문의하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하고 11 이에 예수께 묻자와 이르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12 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어찌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냐 13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가 왔으되 기록된 바와 같이 사람들이 함부로 대우하였느니라 하시니라
– 그리고, 그들 사이에 하나님이 오십니다. 하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나님의 말씀은, 이 사건이 제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자리임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이 본심을 드러낸 이후 6일 동안, 제자들이 그 말을 가지고 얼마나 혼란스러워했을까요. 그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온 이 선택과 결정이 맞는 것인지, 예수님이 정말 메시아가 맞는 것인지, 지금 내가 뭘 해야 하는지. 수많은 생각을 하고 서로 이야기하고 갈팡질팡했던 시간들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이 일을 겪고 나서, 예수님이 정말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이심을 다시 한 번 확신하게 되었고, 그 사실을 굳건한 반석으로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예수님의 말을 곱씹기 시작해 봅니다. 왜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이 고난을 받고 죽으셔야 할까 생각해 봅니다. 엘리야와 모세 앞에서 두려움에 떨었던 자신들의 모습도 떠올려 보면서, 예수님의 계획에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제서야, 예수님이 죽은 후에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말이 들립니다.
– 제자들의 생각이 이전과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합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후 다시 살아나실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제자들의 질문도 달라집니다. 아마도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오지 않았으므로 예수님은 메시아가 아니라고 주장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에 기록된 것처럼,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는 것이 맞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역시 기록된 것처럼, 사람들이 그를 함부로 대우하였음을 말씀하십니다. 모든 것을 회복하는 엘리야가 함부로 대우받았다는 말씀이 이뤄졌습니다. 제자들은 세례 요한의 삶과 그의 허망하고 어이없는 죽음이 말씀대로 이루어졌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역시 기록된 대로, 메시아도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할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 일이 즉흥적이고 그들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대하고 깊은 계획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임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말씀에 기록된 삶을 그대로 따라가실 것입니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억울하고 허망해 보이는 삶과 죽음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오차 없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제자들은 그 하나님의 계획이 자신들의 생각대로 이뤄질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아마도, 하나님의 뜻이 그렇다는 것을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기대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는 것에 대한 씁쓸함이 남아 있을 테고요.